• 미 건국 250주년 특집 : 그린스보로 독립전쟁의 영웅
  • 한국인뉴스 Young Lee> Raleigh, North Carolina =

    노스 캐롤라이나 지명 가운데 미 독립전쟁의 영웅을 기리는 지명이 몇 있다. 그 중 그린스보로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린스보로 지명의 유래가 된 너새니얼 그린(Nathanael Greene; 1742-1786)의 유산을 살펴본다.

    '남부의 구원자(Savior of the South)'로 불리는 너새니얼 그린장군은 소모전의 대가로서 미국의 독립을 확보했다. 그는 1781년 3월 15일 그린스보로 인근에서 벌어진 중대한 길포드 코트하우스 전투에서 엄밀히 말해 패배했으나, 그의 전략은 영국군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고 궁극적으로 요크타운에서의 승리로 향하는 길을 닦았다. 그린의 군사 철학은 그가 조지 워싱턴에게 보낸 서한의 문구인 "우리는 싸우고, 패하고, 다시 싸운다"에 가장 잘 요약되어 있다. 그의 유산은 몇 가지 핵심 전략과 역사적 이정표를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너새니얼 그린(Nathanael Greene; 1742-1786)


    길포드 코트하우스 전투:

    영국군 사령관 찰스 콘월리스 백작이 전술적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이는 파멸적인 희생을 많이 치른 승리였다. 그린의 종심방어 전략은 영국군을 지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콘월리스는 병력의 25% 이상을 잃었다. 영국 의회 의원 찰스 제임스 폭스는 "이와 같은 승리가 한 번 더 있다면 영국군은 파멸할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영국군 통제력의 와해:

    막대한 대가를 치른 교전 이후, 그린은 노스 캐롤라이나와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내륙 지역을 되찾기 위해 남쪽으로 기동하며 영국군을 고립된 해안 요새로 몰아넣었다. 이로 인해 콘월리스는 버지니아로 진격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곧 그의 항복으로 직결되었다.

    '싸우는 퀘이커교도':

    1742년 로드아일랜드 워릭의 퀘이커교도 가정에서 태어난 그린은 지역 민병대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평화주의를 표방하는 교회에서 파문당했으나, 조지 워싱턴의 가장 필수 불가결하고 지적으로 잘 훈련된 지휘관 중 한 명임을 스스로 증명해 보였다.

    도시 이름의 유래:

    1808년 길포드 카운티는 해당 지역의 지리적 중심지에 새로운 카운티 청사 소재지를 설립하고, 그린 장군이 국가에 기여한 중대한 공헌을 기리기 위해 그 이름을 그린스보로로 명명했다.

    오늘날 '싸우는 퀘이커교도'의 유산은 길포드 코트하우스 국립 군사 공원에 보존되어 있다. 방문객들은 그린 장군이 영국군에 맞서 싸웠던 전적지 방문자 센터 주변을 도보나 차량으로 둘러볼 수 있다.

     

    길포드 코트하우스 전투(The Battle of Guilford Courthouse)

    너새니얼 그린 장군이 이끈 미국 남부군 병력은 약 4,500명이었으며, 이에 맞선 콘월리스 장군의 영국군 병력은 약 1,900명 ~ 2,100명 수준이었다.

    남부군이 수적으로 두 배 이상 우세했으나 정규군은 1,400~1,500명 정도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훈련도가 낮은 민병대였던 반면, 영국군은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고도로 훈련된 정예 정규군 중심이었다.

    길포드 코트하우스 전투의 양측 사망자(전사자) 수는 다음과 같다. 공식 기록에 따른 정확한 전사자 수는 양측 모두 100명 미만이었으나, 부상자 중 상당수가 현장이나 후송 중에 추가로 사망했다.


    ·         미국 남부군 (너새니얼 그린 장군 측): 공식 전사자 79명 (부상자 185명)

    ·         영국군 (콘월리스 장군 측): 공식 전사자 93명 (부상자 413명)

    영국군은 전사자와 부상자를 합쳐 전체 병력의 4분의 1이 넘는 총 532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 특히 전투 당시에는 부상자로 분류되었으나 현장의 열악한 의료 환경과 군수 보급 부족으로 인해 며칠 사이에 사망한 이들이 많아, 영국군이 입은 실제 타격은 공식 전사자 수치보다 훨씬 치명적이었다.

    반면 미국 남부군의 경우 전투 직후 1,000여 명이 넘는 민병대가 탈영하거나 가옥으로 귀가하여 '실종' 처리되는 바람에 초기 서류상 사상자 집계에 혼선이 있었으나, 실제 정규군의 치명적인 전투 손실은 영국군보다 훨씬 적었다.

  • 글쓴날 : [26-07-31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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