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초기 역사(2) 영국인의 도착
  • 한국인뉴스 Young Lee> Raleigh, North Carolina =


    영국의 미 대륙 식민지 첫 시도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기 1 년전인 1587년 이었다. 이해 영국의 월터 랄리(Walter Raleigh)경은 현재 노스 캐롤라이나 동부 해안인 로아노케 섬에 한 정착민을 보냈다.


    <사진; 1590년 존 화이트(John White)가 로어노케 식민지(Roanoke Colony)로 돌아와 이전에 떠난 정착지 입구에 새겨진 ‘CROATOAN’ 이란 글자를 발견한 모습. 존 화이트가 그렸다. 화이트는 부하들에게 이것이 식민지가 다른 곳으로 이전했음을 알리기 위해 미리 약속해 둔 신호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크로아토안을 찾지 못했다.>


    <영국인이 도착했을 당시 인디안 마을>


    그러나 이 사람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1590까지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이른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잃어버린 식민지(Lost Colony)이다. 영국인들은 이후 19년 동안 다시 시도를 하지 않았다.




    1606년이 되어서야 그들은 다시 현 버지니아 동부해안에 제임스타운 건설을 시작하였다.


    <제임스 타운 콜로니>


    제임스타운 건설의 재정지원은 일종의 주식회사로 부터 나왔는데 이것은 몇몇 투자자들이 영국왕으로 부터 신 세계에 새로운 농장을 건설하기 위한 권리를 샀던 것이다.

    이 회사는 버지니아 컴퍼니(Virginia Company)로 불리웠다.  그리고 이 지역은 이 회사 이름을 따 버지니아로 명명되었다. 제임스타운 식민지도 거의 '잃어버린 콜로니(Lost Colony)의 전철을 밟아갔다. 정착자들은-이들은 대부분 영국 신사(gentleman)계급이었다-


    새로운 땅이 요구하는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나마 이 식민지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죤 스미스 대위가 엄격한 군율을 이들에게 혹독하게 적용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모토는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He who shall not work shall not eat)." 이었다. 환경이 너무나 어려워 1609년에서 1610년 까지의  대 기근 시기엔 일부 굶주린 개척자들은 죽은 사람의 인육을 먹기도 했고 일부는 아예 정착지를 버리고 인디안 부족에 합류해 버렸다.


    이 식민지는 일단의 인디안 원주민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아마 사라져 버렸을 것이었다. 이들 인디언 부족은 '포화탄 부족연맹(Powhatan Confederacy)' 로 불리워 졌는데 이들은 영국 정착민들에게 어떤 곡식을 심어야 하고 어떻게 재배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1614년 포카혼타스(Pocahontas, 디즈니사에서 만든 만화 영화로도 소개되었다.)라는 이들 인디언 부족 추장의 딸은 정착민의 한 농장 주인인 죤 롤프와 결혼하였는데 이것이 정착민과 인디언들사이의 긴장을 완화 시키는데 기여를 했다.


    <포카혼타스(Pocahontas). 1596년경 태어나 1617년 3월 사망했다. 포우하탄족(Powhatan people)에 속한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이다. 당시 포우하탄 연맹(Powhatan Confederacy)이라 불린 부족 연합의 추장의 딸이었다. 1613년 영국 식민지 개척자들은 적대 행위가 벌어지는 과정에서 포카혼타스를 붙잡아 인질로 잡고 몸값을 요구했다.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그녀는 기독교로 개종하도록 권유받았으며, 레베카(Rebecca)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1614년 4월, 약 17~18세였던 포카혼타스는 담배 재배업자 존 롤프(John Rolfe)와 결혼했다. 1615년 1월에는 아들 토머스 롤프(Thomas Rolfe)를 낳았다.

    1616년 롤프 부부는 런던으로 건너갔다. 포카혼타스는 제임스타운에 대한 투자를 촉진하기 위한 목적으로 영국 사회에 소개됐으며, 당시 영국인들이 말하던 ‘문명화된 야만인(civilized savage)’의 사례로 선전됐다. 포카혼타스는 런던에서 유명 인사가 됐으며 화려한 환대를 받았다.

    1617년 롤프 부부는 버지니아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포카혼타스는 영국 켄트주 그레이브젠드(Gravesend)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사망했다. 당시 나이는 20~21세였다.

    위 포카혼타스의 그림은 네델란드 판화가 시몬 드 파세가 그녀를 만난 후 1616년에 그린 판화.>





    포화탄 부족은 영국 정착민들과의 동맹이 적으로 있는 다른 인디언 부족과의 대결에서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인디언들의 생각은 잘 못된 것이었다. 영국인들은 더 많은 땅이 필요하게 되자 포화탄 부족에게 빚진 것을 잃어버렸다. 이후 수많은 마찰과 싸움 끝에 포화탄 부족 연맹은 1644년 영국 전사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제임스타운은 죤 롤프가 캐시 크롭인 담배를 유럽에 소개하자 눈부시게 번성하였다. 담배는 토착 인디언들이 몇년동안 경작해 오던 것이었다. 담배는 영국에서 대 성공을 거두었고 이것은 전체적으로 버지니아 지역의 운명을 결정 지었다. 담배 경작에는 넓은 땅이 필요했고 담배는 지력을 급속히 소모하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땅이 필요하였기에 버지니아 지역 경제에서 담배가 차치하는 중요성은 이 지역의 급속한 팽창으로 이어졌다. 새로운 정착지가 제임스타운 주위로 급속히 우후 죽순 처럼 뻣쳐 나갔고 이 지역이 체사피크 지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버지니아와 메릴랜드 대부분 지역을 아울르게 되었다.


    체사피크지역으로 이주해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영국의 인구 과다는 대 규모 기근, 질병, 궁핍으로 이어졌다. 개인의 경작 농지를 개선할 기회는 미미했다. 그리서 많은 사람들이 신세계로 이주 할 꿈을 꾸었다. 그 방법은 도제 형식의 농업 근로자(indentured servitude, 의무적으로 일정 년한 농장에서 일해야 하는 거의 노예 수준의 농업 근로자)로 가는 것이었다.


    <도제 노동자(indentured servitude)를 묘사한 그림. 1595년 요한 데브리가 그렸다. 아프리카 노예들이 도착하기 전부터 식민지에서는 백인 강제노동이 사용됐다. 여기 묘사된 설탕 제조는 힘들고 위험한 노동이었다. 사탕수수를 으깨고, 끓인 뒤 굳혀야 했다.>



    아메리카까지 가는 배쌁 대신에 그들은 7년 동안 노동일을 의무적으로 계약해야했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자유를 얻었다. 17세기에는 이러한 도제 농업 노동자들은 자유를 얻음과 동시에 조그만 땅을 받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들은 생존 할 수 있었고 또 투표권도 가질 수 있었다. 도제 노동자-이들은 대부분 젊고 건강한 자들이었지만-의 삶은 극한적으로 힘 들었다. 도제 노동자들의 절반이 계약 기간을 체우지 못하고 죽었다. 그럼에도 도제 노동자자리는 인기가 있었다. 17세기 영국에서 체사피크로 이민한 13만의 영국 남자들중 75%가 도제 노동자이었다.



    아메리카의 민주주의는 이 체사피크에서 싹을 텄다. 1619년 버지니아는 '하우스 버지스(식민지 시대의 하원의원)' 제도를 확립하였다. 하원의원을 선출할 투표권은 재산을 소유한 남성에 한했다. 하원에서 가결되는 모든 결정은 최종적으로 버지니아 컴퍼니의 승인을 받아야했다. 이 해는 또한 식민지에서 노예제가 시작 되기도 한 해이었다.

  • 글쓴날 : [26-10-23 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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